어울림의 축복
옛날에 한 공작새 부부가
예쁜 외동딸 공작새를 곱게 키워
숲으로 시집보냈습니다.
그런데 시집 간 딸이 얼마
되지 않아
잔뜩 풀이 죽은
채 친정으로 날아왔습니다.
엄마가 사연을 묻자 딸이 하소연했습니다.
“엄마! 숲의 새들이 다
저를 따돌려요.
외로워 견딜
수가 없어요.
남편도 이해
못해요.”
노련한 엄마는
무엇인가 짐작하고 물었습니다.
“너, 숲에서 아무 때나
꽁지를 활짝 펴서
다른 새들
앞에서 뽐냈지?
내 말 맞지?”
딸은 엄마가 자기의 행동을 알고 있자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엄마! 우리 꼬리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조금
펼치면 어때요?”
엄마가 말했습니다.
“얘야! 하느님이 주신 것은
남을 부끄럽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냐!
골프에는 ‘젠틀맨 골프
상식’이 있는데
그것은
주위에 골프 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골프 얘기를 안 꺼내는 거야!
그 의미를 알겠니?”
딸은 고개를 끄덕이며 숲으로
날아가서
그 때부터 다른
새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승자도 없고
영원한 패자도 없습니다.
또한 영원한 원고도 없고
영원한 피고도 없습니다.
다 어울려 살아야 할 대상입니다.
후크 선장이 피터 팬을
괴롭힌 것은
외로움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피터 팬과 어울리고 싶은데
해적 두목이라는 위신에
대놓고 친할 수 없으니까 당하는 척 하며
피터 팬과 어울렸다는 것입니다.
사람 중에 악마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선물을 기다리는
외로움에 지친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선물’이
되어 어울려줄 때
진리와
행복이 다가옵니다.
다툼
속에는 진리가 거할 수 없습니다.
다툼은
자기 영혼의 손목을
칼로 긋는 것입니다.
남과 다투는 것은
내 영혼과 다투는 것이고,
남과 멀어지는 것은
내 양심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남을 울리면
그 울음소리가 칼이 되어
내 영혼의 동맥을
끊습니다.
‘울림’은 행운에 기대는 삶이고
‘어울림’은 행복을 부르는
삶입니다.
‘울림’은 나를
주변인으로 만들지만
‘어울림’은 나를 중심인으로 만듭니다.
‘울림’은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스타의식에서 나오고,
‘어울림’은 “나는 그들과 같다!”는
평민의식에서 나옵니다.
스타에게는 ‘울림’이 있지만
평민에게는 ‘어울림’이 있습니다.
스타는 짐이 되지만
평민은 힘이 됩니다.
스타가 없는 곳에
진정한 어울림이
형성됩니다.
약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도움 이전에 인정입니다.
그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의 행복은 나의 행복과 잇닿아 있습니다.
그를 음지에서 양지로
향하도록 환대할 때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은총이 있습니다.
약자와의 어울림은 하늘과의 어울림입니다.
약자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낼 때
하늘로부터 더욱 따뜻한 시선을 받을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고고하게
지냄보다
낮은 곳에서 어울려
지냄이 축복입니다.
고고함은
골짜기로 가는 지름길이지만
어울림은 꼭대기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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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온 글
(영국 화가 Frederick Morgan 1847-1927)
감사합니다.
훈훈해지네요.